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김정호의 지도에서 찾아본 독도

Introduction to world literatu 2025. 2. 23.

김정호의 첫 번째 전국지도 《청구도》에서 찾아본 독도···

조선시대 지리학자에 대해 누군가 물어본다면 유치원 다니는 조카에서부터 주변 친구들까지 대부분 ‘김정호’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신분제도가 있었던 조선시대에 중인의 신분이었던 김정호가 오늘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조선시대 지리학자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그가 제작한 지도들이다.

조선후기 실학자 최한기(崔漢綺)의 ‘청구도제’에 의하면 김정호는 스무 살 이전부터 기존의 지도와 지리지에 관심이 있었고, 동시에 새로운 지도와 지리지 편찬을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그의 첫 번째 지리지는 『동여도지(東與圖志)』로, 사실 첫 번째 지리지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거의 평생에 걸쳐 보완했다고 할 수 있다. 1822년에 시작하여 일차적으로 편찬 · 완성한 시기는 1834년(순조 34)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총 2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남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동여도지』의 경우 20책 가운데 현재 제8, 14, 18책 등 3책은 결본이어서 17책만 남아 있다.

그의 첫 번째 지리지가 『동여도지』라면, 그의 첫 번째 지도는 《청구도》이다. 1834년에 제작된 《청구도》에는 김정호가 그동안 제작된 다양한 지도와 지리지를 보면서 보다 효율적이고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고민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 결과 기존의 지도 방법과는 차별화 된 김정호만의 첫 전국지도가 탄생하게 되었고, 그는 지리지와 마찬가지로 지도도 계속적으로 수정하여 1840년대 말까지 3차에 걸친 개정판을 제작하였다. 현재 《청구요람(靑邱要覽)》 · 《청구선표도(靑邱線表圖)》 등의 제목을 가진 전사본을 포함 총 17본이 전해지고 있다.

김정호의 첫 지도인 《청구도》가 기존 지도와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일까?

첫째, 《청구도》는 행정구역 단위가 아니라 현대식 대축척지도처럼 일정한 크기의 지역도로 나뉘어 있어 지역을 연결시켜 보기에 편리하다. 즉 기존에 제작되었던 군현지도책의 경우 군현단위로 지도가 제작되었다면 청구도는 전국을 같은 면적으로 나누어 지도를 제작하고 책으로 묶은 것이다. 그 결과 《청구도》는 전국을 가로 22판, 세로 29층으로 나누고, 이 가운데 홀수 층과 짝수 층을 나눠 각각 하나의 책(건곤(乾坤)으로 구성)으로 묶었다. 그리고 《청구도》 앞쪽에 실려 있는 ‘본조팔도주현도총목(本朝八道州縣圖總目)’은 각 지역 지도를 찾기 위한 색인과 목록 구실을 한다(그림 1).

 

그림 1. 《청구도》의 본조팔도주현도총목
그림 1. 《청구도》의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둘째, 우리가 알고 있는 《대동여지도》와 같은 대축척 전국지도이다. 즉, 전국을 남북 29층, 동서 22판으로 나눈 방안지도(方眼地圖)로서, 방안의 실제거리는 남북이 100리, 동서가 70리이다. 그리고 거리를 파악할 수 있게 지도 외곽에 가로 7, 세로 10의 눈금을 표시하였다. 지도에서 실제 방안의 크기가 세로 25cm, 가로 17.5cm이므로, 지도의 축척은 약 1/160,000이 된다. 동시에 기존에 제작되었던 방안지도와의 차이점은 지도의 흐름을 끊는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도 내에 방안(원고지 형태의 격자무늬)을 생략했다는 점이다.

셋째, ‘청구도범례’에 따르면 김정호는 지도에 수록할 지명을 선별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고민을 하였고, 그 결과 지도를 제작하는 입장이 아닌 지도를 사용하는 입장에서 필요한 지명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지도에 수록하였다. 즉, 산수의 형세, 군현의 동서, 도리(道里)의 원근, 고개와 골짜기의 험이(險夷)를 살피는 데 유용한 지면들을 우선적으로 지도에 수록하였다.

그리고 지형 · 수계 · 성곽 · 창고 · 역도(驛道) · 봉수 · 진도(津渡) · 교량 · 고개 · 도서 · 시장 · 호구 · 군병 · 제언 · 토산 · 인물 · 공납 · 풍속 · 사찰 · 능원 · 고적 등을 상세히 기록해놓아 지지적인 내용이 결합된 지도이다. 지도에 수록된 지리정보의 특징은 모든 고을마다 호구 수, 토지면적, 군사의 총계,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의 총량, 서울까지의 거리 등을 기록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지역의 경우 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김정호의 첫 번째 지도에 독도는 어떻게 그려져 있었을까?

울릉도와 우산도의 모습은 《청구도》 18층 3판과 4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림 2).

 

그림 2.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청구도》의 울릉도 · 우산 부분

울릉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조선후기에 제작된 군현지도책에 수록되어 있는 모습과 유사하다. 가운데 중봉(中峯)을 중심으로 사방의 산줄기가 해안 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지도 오른쪽 여백에는 역사가, 그리고 왼쪽 여백에는 울릉도의 산물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의 산물에 대한 기록 중 특이하게 원숭이(狙)가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울릉도 서쪽에 붉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은 ‘주토굴(朱土窟)’ 이며, 그 외에 죽전, 석장, 저전동 등에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울릉도 동쪽에는 우산도가 세로로 길게 그려져 있으며, 그 안에 우산도의 모습을 따라 산줄기가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구도》의 가장 큰 특징은 산이 서로 연결되어 산맥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는 점인데, 이는 초기에 제작된 《청구도》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청구요람》과 고려대학교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구도》의 울릉도 · 우산도 부분의 모습은 (그림 3)과 같다.

 

 《청구요람》(좌)의 울릉도 · 독도 모습 《청구도》(우)의 울릉도 · 독도 모습
그림 3. 《청구요람》(좌)과 《청구도》(우)의 울릉도 · 독도 모습

 

(그림 2)와 (그림 3)에서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산의 모습이다. 이 두 지도의 경우 울릉도 중앙에 중봉을 독립적인 산으로 그리고 하천의 흐름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의 우산도의 모습과 달리 우산도의 북쪽 끝 부분에 산의 모습을 간략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울릉도와 우산도의 전체적인 윤곽은 비슷하며, 지도 여백에 기록한 주기의 내용 또한 유사하다.

마지막으로 규장각한국학연구에 소장되어 있는 《청구도》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구도》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그림 4).

 

 

그림 4.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청구도》
그림 4.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청구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청구도》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구도》와 같이 울릉도 중앙의 중봉에서부터 연결된 산이 해안까지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산도의 산 모습은 (그림 2)과 (그림 3)의 우산도 모습을 합쳐놓은 듯하다. 그리고 (그림 2)과 (그림 3)에 기록되어 있는 울릉도의 역사와 토산물에 대한 주기가 생략되어 있으며, 대신에 우산도 아래에 ‘英宗十一年 江原監使趙最壽 啓言 鬱陵島地廣土沃有人居間地 而又有于山島 亦廣闊云卽 所謂西字與 此圖之在東相佐’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영조 11년(1735)에 강원도 감사 조최수(趙最壽)가 장계를 올려 말하기를, 울릉도는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며, 사람이 거주한 흔적이 있다. 그리고 우산도가 있는데, 역시 넓고 광활하다.’라고 이른 즉, 소위 서자(西字)는 이 지도에서 동쪽에 있는 것과 서로 다르다라는 내용이다.

이처럼 김정호의 첫 전국지도인 《청구도》에서 우산도의 모습은 《청구도》의 수정과 함께 그 모습이 지도의 표현방법 변화와 함께 변화하긴 하였지만, 우산도는 항상 울릉도의 동쪽에 그려져 있었다. 이는 김정호가 그의 첫 지도를 제작하고, 이를 계속적으로 수정해가는 과정에서 우산도에 대해 인식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정호’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가 있다. 그것은 목판본 《대동여지도》이다. 필사본으로 제작된 《청구도》와 달리 목판본으로 제작된 《대동여지도》는 목판으로 제작하여 지도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점, 목판본 지도임에도 불구하고 기호를 사용하여 보다 많은 정보를 수록했다는 점,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으로 제작하여 이용의 편리성을 높인 점 등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목판본 《대동여지도》에는 울릉도 동쪽에 있어야 할 우산도가 생략되어 있어 일본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 이에 대해 한국 학계에서는 우산도가 판각 범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또한 현재 발견되고 있는 필사본 《대동여지도》 중에 우산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도 있다(그림 5).

 

그림 5. 우산도가 표시되어 있는 《대동여지도(한국연구원 자료실 소장)》
그림 5. 우산도가 표시되어 있는 《대동여지도(한국연구원 자료실 소장)》

 

앞으로 이에 대한 보다 철저한 고증과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 우산도가 표시되어 있는 필사본 《대동여지도》는 2종이다. 하나는 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동여지도》이며, 또 하나는 서울 서대문구 한국연구원 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는 《대동여지도》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