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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도에 그려진 독도의 의미는···
역사가 전개되면서 인간의 경험을 통해 인식된 지리적 세계에 대한 지식과 표현은 사회적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개인이 제작한 세계지도라 하더라도 그 지도 안에는 긴 역사적 과정 속에 형성되어 전수된 세계에 대한 사고가 투영되어 있으며, 당시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 · 관습 · 종교 등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에 제작된 세계지도를 통해 당시인들이 인식했던 세계를 형상화 할 수 있으며, 과거 지역간 문화교류의 일단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지도는 좁은 지역을 그려낸 지도와는 달리 지역간 문화교류를 통해 제작되기도 하며, 완전히 고립되고 폐쇄된 사회가 아니라면 지리적 세계에 대한 인식과 그의 표현은 주변 문화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형성되고 변용(變容)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문화권에서 제작된 세계지도가 도입됨에 따라 기존에 형성된 세계인식이 어떻게 변형되는가는 인식의 변화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1).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에 위치한 바위섬이다. 울릉도를 우산국(于山國)이라 칭했던 삼국시대부터 우산도(于山島)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남아있는 자료를 보면 ‘우(于)’라는 한자를 오독하여 ‘자산도(子山島)’, ‘천산도(千山島)’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도에 표현된 그 위치의 경우 대부분 울릉도 동쪽에 그려져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울릉도의 서쪽이나 남쪽에 그려진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한 바위섬 독도가 우리나라 지도에, 그리고 세계지도에 그려진 이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인도를 포함하여 한반도주변에는 4,000여개가 넘는 섬이 있다. 그 가운데 세계지도에 그려진 섬의 개수는 제주도를 포함하여 총 10개 미만이며, 오늘날 제작되는 세계지도에서 그보다도 적은 섬만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도에 그 위치가 그려지고 지명이 표기되었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만약 섬의 크기가 섬을 지도에 포함시키는 기준이었다면 독도는 제외되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조선 본토와의 거리를 기준으로 했을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크기나 본토와의 거리와 상관없이 독도를 조선시대에 제작된 전도에, 더 나아가 세계지도에 그려진 이유는 크기나 거리와 같은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가장 동쪽에 위치한 섬에 대한 관심과 중요도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지도에 반영되었다. 고려시대까지 울릉도 일도(一島) 중심의 인식이 울릉도와 우산도 이도(二島)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존하는 고지도 가운데 고려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에서 울릉도 지역 인식의 일단을 파악해 볼 수 있다(그림 1).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로서, 중국과 일본의 지도를 바탕으로 좌정승 김사형(金士衡), 우정승 이무(李茂), 검상 이회(李薈)가 제작하였으며, 지도 아래에는 대사성 권근(權近)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는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지도를 기초로, 최신의 조선지도와 일본지도를 결합 · 편집하여 만든 세계지도로 가운데 조선 부분이 고려시대에 제작된 한반도 지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전체 지도의 윤곽과 산수계는 고려시대 지도의 전통을 따르면서, 변화한 조선시대의 새롭게 바뀐 행정체계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해안을 따라 표시된 유명 포구와 섬들에 대한 정보는 고려시대의 정보를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보이며, 동해안 울진포 동쪽에 울릉도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울릉도 이외의 섬은 그려져 있지 않으며, 이는 고려시대 울릉도 일도 중심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울릉도 일도 인식의 표현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동일 계열에 속하는 지도인 《대명국도(일본 텐리대 소장)》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2).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울릉도와 우산도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세종실록지리지』의 지리지 부분인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우산도와 무릉도 2개의 섬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특히 기술된 내용 중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라는 부분이 있다.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맑은은 날 볼 수 있는 섬은 독도로, 울릉도 옆의 죽도나 관음도는 거리가 가까워 맑은 날이 아니라도 충분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식은 지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그림 2).
(그림 2)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되어 있는 《화동고지도》이다.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동고지도》의 경우 지도의 훼손이 좀 심한 편이지만 울릉도와 독도 부분을 자세히 확인해보면, 파도 물결 사이로 두 개의 섬이 그려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세계지도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 지도부에 소장되어 있는 《천하여지도 모회증보본》3)은 17세기 초기 제작된 왕반(王拌)의 여지도를 저본으로 하여 조선인이 모사, 제작한 지도로 추정되는 지도이다. 지도에 표기된 조선의 지명은 17세기 중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며, 지도 하단 왕반의 발문 옆 조선인이 쓴 발문에는 ‘우리나라에 천하여지도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분실되어 이제 새로이 여지도 8폭을 얻어 그 지도에 우리나라와 일본, 유구 등의 지도를 붙인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이 지도 역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같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지도에 우리나라와 일본의 최신 지도를 편집한 것으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눈에 띄게 다른 2가지 점이 보인다. 첫 번째는 일본의 모습으로 이전 시기 세계지도와 비교하여 매우 정교해졌으며, 두 번째는 바로 울릉도와 독도 부분이다. 울릉도 일도를 중심으로 그려졌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달리 《천하여지도 모회증보본》에서는 울릉도 왼쪽에 또 하나의 섬이 그려져 있다.
비록 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울릉도의 위치가 오른쪽이 아닌 울릉도의 왼쪽에 그려져 있지만, 분명 독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이와 같은 전통적인 세계인식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울릉도와 독도가 그려져 있는 세계지도는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747년의 《천하여지도》.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천하대총일람지도(그림 4)》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천하여지도 모회증보본》와 비슷하게 울릉도 왼쪽에 우산도가 그려져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 《천하대총일람지도》의 전체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채색필사본 지도로 대략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본토와 조선, 유구 등이 그려져 있으며 일본은 생략되어 있으며, 중국 본토의 경우 표시된 지리적 정보는 청의 완전한 중원 장악 이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4). 조선 부분의 윤곽은 북부지방이 왜곡된 모습을 조선 전기에 제작된 전도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팔도의 경계를 붉은 선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감영 소재지를 크게 부각시켜 표현하고 있다.
《천하여지도》의 경우 이전에 제작된 세계지도가 주로 필사본으로 제작된 것과 달리 세로 119.7cm, 가로 109.5cm 크기의 대형 목판본으로 제작되었다. 이는 개인이 지도를 제작했다기 보다는 국가의 주도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 지도 역시 제작하는 과정에서 중국으로부터 유입한 지도를 참고하였다. 특히 청의 강희제 때 측량에 의해 제작한 《황여전람도》의 성과가 반영되어 있다.
《황여전람도》는 강희제가 1707년 최초로 서양식 경위선제작 방법을 도입하여 10년에 걸친 측량을 바탕으로 제작된 서구식 실측지도이다. 이는 중국 최초의 측량지도로 높이 평가되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권위 있는 지도로서 많은 지도의 모본(模本)이 되고 있다. 그리고 《황여전람도》의 조선 지도는 그 뒤 d’Anville과 Du Halde의 『중국지지(中國地誌)』 중 「조선왕국도(Royaume de Corée)」에 반영되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황여전람도》의 조선 부분으로, 이는 숙종 때 목극등(穆克登)이 조선으로부터 가져간 지도를 바탕으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황여전람도》에 포함되어 있는 <만한합벽청내부일통여지비도(滿漢合壁淸內府一統輿地秘圖)>와 <건륭십삼배도(乾隆十三排圖)>의 조선 부분을 살펴보면, 동쪽 해안 가까이에 ‘천산도(千山島) · 울릉도(菀陵島)’가 표시되어 있으며, 이는 d’Anville이 제작한 <조선왕국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Tchian chan tao · Fan ling tao’로 표기되었다(그림 5).
Fan ling tao’는 중국식 발음으로 ‘완릉도’를 표기한 것으로, ‘菀’자는 ‘鬱’자 대신에 종종 표기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울’ 또는 ‘완’으로 발음되었다.
영국에서 제작된 아시아 지도를 살펴보면, 왕실 지리학자인 와일드(J. Wyld)는 서해안 탐사 결과를 반영하여 1827년에 지도를 제작하였다(그림 6).
이 지도에는 동해가 ‘Gulf of Corea’로 표기되어 있으며, 이전까지 제작되었던 d’Anville 지도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울릉도를 라페루즈의 탐사 결과를 반영하여 ‘Dagelet’로 표기하였고, 서북쪽에는 ‘Argonaut’가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1791년 영국의 콜넷(J.Colnett) 제독의 ‘Argonaut’호가 울릉도를 잘못 측량하여 표시한 것이 반영된 것이다.